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작가 허준율은 텅 빈 파리 지하철 역에서 쓰레기통 주변에 사람들이 쓰다 버린 마스크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린 시절 심한 천식으로 고생했던 그에게 쓰레기통과 사람들의 들숨 날숨이 담겨있던 마스크들의 조합은 다각적인 관점에서 관계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2021년 파리에서 시작된 La Poubelle 작업의 시작점이다.
당시 그는 실제로 파리 지하철에 있는 쓰레기통의 뼈대를 가지고 와서, 그 뼈대 속에 작가 본인의 숨쉬는 패턴을 프로그래밍한 마이크로 컨트롤러를 통해 플라스틱 백이 거대한 마스크와 같이 숨을 쉬는 것처럼 움직이게 하였다.
이 작업에는 “과거 천식으로 인해 당연하지 않게 숨을 쉰다는 개인의 경험이 집단으로 어떻게 전이되고 공감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녹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전위적인 전시에 어린이들이 가장 크게 반응했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과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아이들 눈에 플라스틱 백이 숨쉬는 모습은 마스크 속 자신, 가족, 친구들의 모습임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2023년 가을, 허준율 작가는 제주도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1)을 통해 [부유하는 존재들의 재회, A reunion of floating beings] 개인전에서 인류사회와 자연과의 공생관계에 대한 확장된 시각을 표현한다. 바닷가에 떠밀려온 수많은 부유물들을 보며, 생태적인 요소와 인공 폐기물들이 결합하여 각각 본연의 성질과 다른 모습으로 관계의 미학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기록해 나간다.
1)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Artist Residency Program)은 특정 기관 혹은 도시에서 예술가들이 특정 지역에 머물면서 창작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국내에서 제주시는 2018년부터 제주문화예술재단과 함께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AiR)’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들이 제주도의 자연환경에 몰입하여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작가 허준율은 존재하는 사물간의 상호작용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변화와 가능성에 관심이 많다.
인터뷰를 통해 세상의 흩어져 있는 존재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그것들을 잇는 관계성의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한다는 작가의 개인적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물성탐구를 하는 행위 만큼이나 주변에서 존재들의 만남과 이별을 목도하고 보이지 않는 관계 자체에 대한 의문 또한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구리(Copper)는 역사적으로 르네상스 시대 건축가를 비롯해 동시대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해온 재료이다.
“구리는 인류사에서 대체불가능한 역할을 해 왔고, 또 현대 사회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디지털 세상에서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재료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허준율 작가가 구리(Copper)를 기술 연구소 연구원들처럼 탐구하며 다른 물성의 소재들과 연결시키고 있는 이유이다.
2023년 제주도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H2는 구리천(Copper Conductive Fabric)이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의 흔적들을 기록하고 공유한 작업이다. (그 흔적들은 상호관계를 맺는 존재를 부각시키기 보다는) 사진술을 개발한 니세포르 니에프스(Nicéphore Niépce, 1765-1833)가 첫 사진을 기록할 때 기록지를 동판부터 여러가지를 실험을 하였듯, 허준율 작가에게 구리천은 캔버스보다는 그만의 사진적 요소가 강한 필름에 더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 허준율 작가가 예술가의 길에 들어선 첫 걸음은 사진이었다.
한국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던 중 군대 생활에서 국방일보 사진기자와의 인연으로 필름 카메라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사진을 찍은 후, 현상 인화를 기다리는 그 설레임의 시간들은 그를 미국 캘리포니아 Brook Institute에서 Photography Artist로의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졸업 후 10년 동안 허준율 작가는 Photography Artist로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양쪽을 넘나들며 그만의 시선이 담긴 많은 작품들을 남긴다.
● 한국은행에서 소장 중인 작품
● 조선팰러스 호텔에서 소장 중인 작품
사진을 넘어 다양한 미디엄(medium)에 대한 호기심이
순수예술가의 길로 새로운 챕터를 열게하다.
타인과의 대화, SNS상에 뿌려진 고양이 밈(Cat Meme), 음악, 과학저널, 작가가 일상에서 마주한 현실 등, 외부와 그의 내부가 교류하면서 발생하는 필연적이고도 우연적인 부산물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받는다는 작가는 다양한 미디엄(medium)2)으로 작업하는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에 대한 강한 목마름에 다시 프랑스로 넘어가 Paris College of Art에서 순수예술(Fine Art)를 공부하게 된다.
2) 미술에서 ‘미디엄’은 매체를 뜻하는 말로 페인팅, 드로잉, 입체, 사진, 영상, 사운드 등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성과 영감을 표현하는 장르를 일컫는다.
“만월보다는 초승달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물음을 던지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물음은 은유적이고 채워 나갈 빈공간이 많은 유연한 형태이길 기대하죠.”
다양한 미디엄을 통해 존재하는 사물들간 의 관계의 미학을 강조해온 허준율 작가는 사람들과 사진을 통해 경험과 시각(frame)을 공유하는 관계의 미학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 이번에 런칭하는 101 프로그램 이름이 독특한데요… 특별한 뜻이 있나요?
“101은 제가 첫 사진 수업을 들을 때 코드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이용한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번호이기도 하지요. 그 뒤로 저에게는 첫 스텝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되었습니다. 다만 수업의 부제(?) 혹은 숨겨진 이름 !?!과도 시각적으로도 연결이 자연스럽더군요.
모두에게 첫 경험은 느낌표와 물음표가 섞여서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을 들게 만듭니다. 설레임과 두려움 등이 한데 섞여 예측하기 힘든 그 순간의 경험이 짜릿하게 기억이 남습니다. 101으로 시작하지만 참가자분들의 기억에 느낌표와 물음표가 긍정적으로 섞인 경험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 101 프로그램을 통해 참가자분들과 나누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허준율 작가는 그가 20년전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고 느꼈던 설레임과 충만감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길 기대하고 있다. 핸드폰을 통해서 일상의 매 순간 사진을 찍는 것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경험들이 사진이라는 미디엄으로 잘 표현될 수 있도록 도우는 역할 역시 예술가로서의 그의 몫이라고 한다.
“개인이 찍은 사진에는 그의 생각, 살아온 삶의 한 단편이 담겨 있습니다. 각자가, 바라보는 특별한 인식의 틀(frame)을 공유하며, 소통을 통해 프레임(frame)을 유연하게 만들고, 그 프레임(frame)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지를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하기에 다소 경직된 일반적인 소통의 수업 방식이 아닌 사진이라는 미디엄을 중심으로 문학, 예술, 그리고 삶을 이야기하는 카페 문화 형태를 추구합니다”
작가는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너무나 담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 예들 들어 아이가 태어나 첫 만남을 갖는 순간, 혹은 진부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석양을 맞이하게 된 순간들…
“후일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서 그 순간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특정 순간을(moment) 기록(document)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경험(experience)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